초여름 저녁 산책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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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섯 시 넘었는데 아직 밝다. 그래서 그냥 나갔다.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창밖이 환한 걸 보면 좀 억울하다. 안 나가면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.
엘리베이터 타서 1층을 안 눌렀다. 문 닫히고 아무 데도 안 가길래 그제야 눌렀다. 몇 초 동안 멍하니 서서 왜 안 움직이나 하고 있었다. 이런 거 자주 한다.
이어폰 챙긴다는 걸 또 까먹었다. 신발 신을 때까지 몰랐고, 밖에 나와서 주머니에 손 넣었다가 알았다. 다시 올라가기 귀찮아서 그냥 걸었다. 없으면 없는 대로 걷는다.
걸으면 머리가 알아서 이상한 걸 굴린다. 오늘은 초능력이었다. 하나만 준다면 뭐가 제일 나을까. 순간이동은 좌표 잘못 찍으면 벽 안에 박힐 것 같다. 목적지를 얼마나 정확히 떠올려야 하는지도 모르겠고. 시간 정지는 멈춘 세계에선 공기도 멈춰 있을 테니 숨을 못 쉰다. 나만 움직인다 쳐도 뭘 붙잡거나 밀 수 있는지부터 애매하다. 투명인간은 눈에 빛이 안 들어와서 앞이 안 보인다고 어디서 봤다. 투명한 눈알엔 상이 안 맺힌다는 거다. 그럴듯했다. 다 별로다. 결국 '내가 뭘 어디 뒀는지 아는 능력'으로 정했다. 초라한데 나한텐 이게 제일 쓸모 있다. 리모컨이며 카드며 하루에 몇 번씩 찾는다. 이걸 이십 분 동안 진지하게 골랐다. 아무도 안 준다.
한 바퀴 돌고 들어왔다. 특별한 건 없었다. 아는 얼굴도 안 마주쳤고 뭘 사지도 않았다.
물 마시고 다시 앉았다. 아직 밝다. 여름은 이래서 좋다.